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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시적 인간입니까?

– 글 김선미 / 사진 PHC

자주 가는 초밥집은 그날따라 대기 줄이 길었다. 길가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왠지 지루해져 풍경을 살폈다. 행인들의 표정은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이 무표정할까. 저 가게는 벌써 주인이 세 번째 바뀌었구나, 그렇게 일상의 장면들이 낯설어질 무렵, 공중에 걸려 있는 글귀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 ’Poetic Humans Club’. 맙소사, 시적인 인간들의 클럽이라니.


‘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한동안 금기였다. 시를 쓰고 싶은 욕망, 그 밑동은 잘렸으나 뿌리는 여전히 내 피부 아래 싱싱하게 살아있었던 탓이다. 매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을 사고 서점에 갈 때마다 시집 코너를 어슬렁거렸지만, 막상 세상에 나온 시어들을 마주하는 건 괴롭거나 시시했다. 질투와 동경, 무시 그 어딘가에 내 마음이 있었다.

시적 인간들의 클럽이라…뭐 하는 곳일까. 시적인 인간들이 단체로 모여 있으면 좀 웃길 것 같은데. 카페인가? 아니면 서점? 단서라고는 그저 공중에 걸린 간판 하나뿐이니 들어가보는 수 밖에. 그렇게 나는 간판이 가리키는 2층으로 향했다. 그곳은 주인보다 손님의 존재가 더 어색한, 문 연 지 3일밖에 되지 않은 카페이자 바였다. 어색한 첫 방문 이후 회의를 하러, 친구들과 밀린 이야기를 하러, 때로는 풀리지 않는 글의 실마리를 찾으러 이곳을 찾았다. 노머신 카페 특유의 고요함, 책으로 꽉 차 마음을 들뜨게 하는 서재, 커다란 쉐어 테이블은 혼자여도, 함께여도 거뜬히 이야기를 품게 했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시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정답 없는 질문에 대해 함께 답하기 위해 모두를 위한 공간을 꾸렸습니다. 이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서로 연결되며, 나아가 세계의 확장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곳은 시적 인간, 바로 당신을 위한 공간입니다.

처음 Poetic Humans Club(이하 PHC)을 방문하면 위와 같이 적혀 있는 캡션 카드를 받게 된다. 카페이자, 창작을 위한 아지트, 교류를 위한 광장의 역할을 하는 이곳은 그림 그리는 배윤수와 글 쓰는 박지용이 10개월을 준비해 꾸린 공간. 누군가는 창가 옆 푹신한 의자에 몸을 담그며 하루종일 책을 읽고, 또 누군가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서 놓인 연필로 무언가를 끄적인다. 여기저기 찰칵찰칵 인증샷을 찍는 무리도 간간이 눈에 띈다.

향긋한 와인과 해방촌 오랑오랑의 원두로 내리는 드립커피, 폭신한 베이커리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책들과 가지런히 모여 있는 시집들이 이곳의 핵심. 쓸 것과 지울 것이 놓인 커다란 테이블에선 언제라도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결이 다른 공간의 힘

PHC는 크게 홀과 서재 공간으로 나뉜다. 배윤수와 박지용은 상호작용을 하는 광장의 의미로서 홀을,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사색과 창작의 공간으로서 서재를 꾸몄다. 서재에 꽉 차 있는 400여 권의 책은 모두 박지용의 큐레이션으로 이루어진 결과물.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모여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홀과 서재에서 이어지는 또 한 켠에는 포스터샵과 프렉탈 스튜디오의 쇼룸이자 작업실 공간이 있다. 사진을 중심으로 한 포스터와 작품들을 관람하고 구매할 수 있는 곳. 이 역시 PHC를 찾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경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사람을 모으고 연결하는 것을 즐기는 배윤수의 또 다른 제안이다.  

장르로서의 ‘시’가 아닌, ‘시적’이라는 확장된 개념을 바라보는 PHC. 과연 시적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 시대에 시적 인간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자폐성으로 점점 고립되는 ‘시’가 아닌, 이야기를 제 스스로 품고 그것을 건넬 줄 아는 ‘시적 인간’들의 클럽.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PHC에서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나누는 일 외에도 다양한 시적 활동들이 펼쳐질 예정이다. 시적 인간의 탐색과 발견, 연결과 확장은 PHC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방향성. 왁자지껄하거나 개성 강한 느낌 대신, 단정하고 내밀한 이곳의 분위기가 누워 있던 생각들을 조용히 흔들어 깨운다.

시적 인간들의 아지트

“비밀스러운 아지트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초대받은 이만 올 수 있는 어떤 비밀스러운 공간.”

입구는 비밀스럽지만 PHC에는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적 인간을 환대하는 화가와 시인이 있다. 이야기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듬직한 테이블과 죽은 자들과 산 자의 생각이 빼곡히 담긴 서재, 언제든 쓰임을 다할 의사가 있는 연필들이 있다. 2020년 겨울, 뿔뿔이 흩어져 있던 시적 인간들이 연남동 모처에 하나둘 모여든다.


[소개]

김선미

서울 연남동에서 기획 및 다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단행본 ‘친절한 뉴욕’, ‘친절한 북유럽’, ‘취향-디자이너의 물건들’ ‘베이징 도큐멘트’를 썼으며 한겨레 신문, 월간 샘터 등에서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는 1930년대 한국 근대 잡지에 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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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순간 –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